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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종교관련 보도자료

"거세 성가대 카스트라토": 인권과 음악의 교차로

1921년에 사망한 마지막 카스트라토 Alessandro Moreschi   사진출처: allthatsinteresting.com

ㅣ카스트라토의 교회 성가대 출현

16세기부터 시작된 카스트라토 이야기는 음악과 인권의 교차점에서 펼쳐진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있다. 이들은 어린 소년 시절 고의로 거세되어 고유의 가창 능력을 유지했고, 성인이 되어도 뛰어난 고음을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가수로 성장했다. 이탈리아 가정에서는 아들들이 카스트라토가 되어 명성과 부를 얻기를 바랐으며, 많은 아이들이 이를 선택했다. 바티칸은 여성이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여 카스트라토의 인기가 높아지게 했고, 교황 시스투스 5세는 1589년 카스트라토를 세인트 피터 성가대에 편입시키는 법령을 내렸다. 일반적으로 카스트라토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음악적 재능이 있는 아들이면 음악학교에 팔려갔다.

 

ㅣ가창력의 매혹과 흡입력

수십 세대에 걸쳐 이탈리아의 어린 소년들은 목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변성기를 막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가창력은 오페라 관객과 황제, 심지어는 교황까지 황홀하게 만들었다. 이들의 뛰어난 가창력으로 인해 카스트라토들은 시스타인 성당에 성가대로 고용되었다.

 

ㅣ규제와 모순: 바티칸의 선택

1500년대부터 이어온 관행에 대해 바티칸이 공식적으로 규탄하고, 거세자를 가톨릭에서 제명시키는 처벌을 시행했다. 1902 바티칸내 교황의 관저 예배실인 시스티나 성당에 카스트라토들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그러나 후대의 교황들이 음성적으로 시행되는 거세술을 후원하게 이유는 바로 카스트라토가 선사하는 성악의 아름다움과 흡입력때문이었다.

 

 교횡 베네딕토 16세자신이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참조하여 거세제도가 불법이라고 인정했으나, 1748년에는 직속 주교가 거세제도를 금지령을 내려야한다는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카스트라토들이 없어지면 교회에 신도수가 줄어들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카스트라토는 교회음악에서 중요하고 호소력있는 존재였다.  이런저런 사정을 빙자해 불법적인 거세술이 암암리에 실행되었고  카스트라토들은  교황에게 고용되었다. 

 

ㅣ카스트라토의 유산과 인권 문제

교황 시스토 5세의 법령을 통해 카스트라토는 교회의 공식적인 성가대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로써 카스트라토들의 활동은 허용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거세가 금지되면서 카스트라토는 점차 사라지면서 그들의 역사는 음악 연구와 인권 문제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카스트라토의 존재는 당시 사회의 가혹함과 중요한 가치를 반영하며, 교회음악의 역사가 인권 유린을 기반으로 성장해왔다는 불편한 진실이 함께 마주해야하는 가혹한 역사의그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