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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대신 권력을 지키다: 한국 가톨릭의 폐쇄적 통치구조

reuby4 2025. 6. 3. 16:11
사진출처: 월간조선

내부 고발자에 대한 조직적 응징

이 사건의 실질적 출발점은 2021년 말 심기열 신부의 용기 있는 문제 제기였다. 그는 자신이 보좌로 있던 본당의 주임신부가 미사와 사목 업무를 소홀히 하고 상습적으로 골프와 당구로 자리를 비우는 업무태만을 교구에 고발했다.

교구 성직자국장의 법정증언에 따르면 “보통 젊은 보좌신부가 주교님과 본당 신부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일반적이진 않다”고 하여, 조직 내에서 아래로부터의 문제 제기 자체를 불경으로 간주하는 문화가 작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 해결보다 문제 제기자 처벌

교구의 대응은 문제 해결이 아닌 문제 제기자에 대한 조직적 응징으로 전개되었다. 2022년 3월, 교구청 총대리주교는 심 신부에게 “억압된 감정이 있으니 전문 심리상담가의 상담이 필요하다”고 통보했다. 정체 불명의 내부 ‘자문단’은 의사 진단 한 번 없이 심 신부에게 ‘편집성 성격장애’가 의심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교구는 두 가지 빈약한 근거로 휴양 명령을 내렸다. 첫째, 14년 전 신학교 입학 당시 인성검사 결과의 일부 부정적 소견이 악화되었다는 주장이었으나, 해당 검사에는 정신질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심 신부는 정상 범위 판정을 받았었다. 둘째, 새로 전보된 본당에서 50대 여성 신자의 호의로 자동차 편의를 제공받은 것을 “지나친 접촉”으로 문제 삼았다.
“순명”이라는 이름의 권위적 통제

일방적 정신질환 낙인
심기열 신부는 교구 명령에 따라 8개월간 여러 병원과 심리상담센터에서 검사를 받았고, 어느 곳에서도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교구는 심 신부가 교구 지정 특정 정신과 의원에서 치료받지 않고 치료 상황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순명”했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과정은 세속 독재 정권에서 반체제 인사를 정신병자로 몰아 탄압하던 수법을 연상시킨다. 심 신부는 “누구 하나 도움을 안 줬다. 내가 강에라도 뛰어들면 이 고통이 끝날까 생각했다”고 토로할 정도로 극심한 좌절을 겪었다.

복음 정신과의 배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교권주의에 물든 조직은 진실을 말한 자를 옥죄어 내쫓았다. 약자를 돌보고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하기는커녕, 제도 유지를 위해 내부 고발자를 정신병자로 몰아 제거하는 모습은 더 이상 건강한 종교 공동체라 부를 수 없다.

성범죄에는 관대하고 내부 고발에는 가혹한
극명한 징계 격차
대구대교구 성직자국장의 법정 증언에 따르면, 지난 20여 년간 면직된 사제는 단 3명에 불과했다. 그 중 둘은 여자 문제와 금전 문제였고, 나머지 하나가 심기열 신부 건이었다. 다음과 같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제들도 모두 면직을 면했다:
•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신부: 정직 처분에 그침
• 교구 산하 법인 여직원 성추행 신부: 경미한 징계 수준
• 노래방에서 여성 도우미와 술판 신부: 정직 후 본당 주임신부로 복귀
조직 보호 우선주의
교회가 성범죄나 중대한 비위 행위 앞에서는 관대하거나 제 식구 챙기기에 급급했지만,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에게는 가혹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한국 천주교가 도덕성을 이유로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일 때, 정작 내부에서는 성직자들의 성범죄도 감싸며 조직의 체면을 우선해왔다.

교회법이라는 방패 뒤의 책임 회피
사법부의 무력함
심기열 신부는 2023년 2월 부당해고 무효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과 2심 모두 “신부는 노동자가 아닌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본안 판단 없이 각하되었다. 법원은 “종교단체의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불과 열이틀 만에 사건을 각하하며 “종교단체 내부 사안은 조사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다른 교구 사제들도 “타 교구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려주었다.

밀실 의사결정의 실상
2022년 11월 22일자 대구대교구 참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교구는 “정직을 거쳐 면직까지 가려면 근거 대기가 어렵다”면서 “차라리 바로 면직부터 내리자”고 결정했다. 절차적 정당성이나 객관적 근거보다는 문제 인물을 조용히 제거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내부 자정 능력의 한계
침묵의 카르텔
심기열 신부의 경우, 동일 교구 내에서 그의 억울함에 공감하여 목소리를 낸 동료나 상급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교구 사제들마저 관망으로 일관했으며, 교회 내부에서 그 누구도 심 신부의 편에 서지 않았다.
심 신부는 “솔직히 제 주변에도 말 못 하게 옷 벗은 동료들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교구의 만행으로 억울하게 축출되었지만 조용히 사제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피해자들이 과거에도 숱했다는 의미이다.

구조적 개혁 불가능성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4년 방한 당시 한국 주교단을 향해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를 촉구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당연시하고, 평신도들과 동떨어진 특권의식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지속 불가능한 위선적 구조
심기열 신부 면직 사건이 보여준 한국 천주교의 모습은 구조적 모순과 위선이다. 교회는 겉으로는 사랑과 정의, 인권과 자비를 말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복음의 이름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정의구현”을 외치던 교회가 정작 내부 정의 구현에는 실패하고, 오히려 불의에 맞선 이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신자들의 신앙 양심과 교회 제도의 현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윤리적 괴리가 벌어지고 있다. 현재의 교회 제도는 스스로 개혁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못했다. 조직의 안위를 위해 복음의 핵심 가치를 저버리는 거짓된 교회는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신앙 공동체의 회복이지, 썩은 권위에 집착하는 기관의 연명이 아니다. 지속 불가능한 것은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며, 한국 천주교회의 미래 역시 예외일 수 없다.